현대문명은 목발과 같다고 하지요. 다리가 다 나았는데도 목발에 계속 의지한다면 다리는 병들게 될 것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영화 중에 특별히 좋아하는 영화들이 있는데
[마부](1962), [안개](1967), [서울의 지붕밑](1961), [느미](1979), [소나기](1978) 등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옛날 영화를 보면 영화의 내용 말고 다른 것이 더 눈에 들어오더군요.
영화 [돼지꿈](1961)은 욕심이 화를 불러온다는 줄거리가 뻔한 영화입니다. 헌데 저에게는 1961년 당시 서울 중산층이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당시 중산층이란 정부가 공급한 단지의 깨끗한 주택(15평 정도)에서 주택할부금을 갚아나가며 사는 수준인 모양입니다.(영화는 유투브로 시청가능)(출연한 아역 배우는 영화배우 안성기씨라고 합니다)
벽돌식 양옥집인데 실내 문들은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문으로 되어있으며 거실은 없고, 방은 2개에 안방은 부부와 초등학생인 아들이 함께 생활합니다. 다른 방에는 식모가 살고, 손님접대는 이 방을 이용하더군요.
이런 좁은 집에 식모까지 산다는 것이 지금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흔한 풍경이었나 봅니다.
서양은 가구가 배치되고 가구의 목적에 따라 방의 목적이 정해지고(응접실, 주방, 서재 등) 사람들이 움직인다면 우리는 방에 이불을 깔면 안방이요, 밥상을 놓으면 주방이요, 서안을 놓으면 서재요, 찻상을 놓으면 응접실이 됩니다.
현대인은 다목적, 다기능, 간편한 휴대를 좋아하는데 옛 한국식 생활의 장점 가운데 이런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불, 밥상, 서안 등을 폈다 접었다 하면서 공간활용을 자유자재로 하고, 앉고 일어서고 허리를 펴고 하는 운동이 저절로 되므로 몸과 맘에 건강과 생기를 줍니다.
이에 비해 서양식 살림은 소파가 있으면 응접실, 식탁이 있는 곳이 주방, 침대가 있는 곳이 안방이 되어 사람이 물건에 맞추어 움직이게 되니 팔다리 허리를 많이 쓰지 않게 되고, 집도 비좁아지게 되고, 집안의 풍경에도 변화가 생기지 않아 생동감은 작다고 보입니다. 물론 몸은 더 편합니다. 또 집이 크다면 가구도 커야 잘 어울립니다.
10평 쯤 되보이는 마당이 눈에 들어옵니다. 마당에는 손으로 펌프질해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수동식 우물펌프가 있습니다.
이 물로 밥과 빨래를 합니다.
방에 있는 유일한 조명은 줄에 스위치가 매달린 백열등 뿐입니다. 그리고 전기는 백열등을 켤 때에만 사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조명은 밝지 않아 방안은 늘 어둡습니다. 그런데 전등갓 아래 그 어둠이 사람들의 대화를 더욱 정겹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밥상에 둘러앉아 가족들이 밥을 먹습니다. 어린 아들은 앉은뱅이 책상에서 공부하다가 집 앞 골목에서 공차기를 하며 한가롭게 보냅니다. 지금의 아이들이 학원가고 게임하기 바쁜 것과 달리 한가롭고 자유로와 보입니다.
동네 집들은 모두 높이가 낮고 높은 건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뒤로 우뚝 솟은 산이 있습니다. 그 시대 서울의 모습은 변두리의 판자촌을 보면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비참했지만 4대문 안의 풍경은 지금에 비해 정말 깨끗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주인공의 집에는 TV, 냉장고, 전화기, 휴대폰도 없습니다.
안방에는 작은 이불장과 옷서랍장만 보입니다. 큰 장롱이나 옷장은 없습니다. 겨울철이라 주인공은 내복을 입고 있네요. 옷차림도 한결같이 양복에 외투 그리고 중절모자 차림입니다. 부인은 한복저고리를 항시 입고 있고, 꼬마는 다 떨어진 신발을 투덜거리며 부모에게 농구화를 사달라고 조릅니다. 모두들 차림새가 간소합니다.
이웃집에서 돼지 새끼 한 마리를 얻어다 마당구석에서 기르는 모습은 지금의 눈으로 볼 때 거의 문화충격에 가깝습니다. 대도시 주택가에서 돼지를 기른다니....
집 가격과 다른 물가의 비율도 지금 시대와 크게 달라 보입니다. 영화에선 돼지 10마리 정도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시대 서울에는 실업이 넘쳐났고 모두가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땅값과 건축비는 매우 저렴했습니다. 지금은 땅값과 주택가격이 수십배나 올랐습니다.
손님들과 술자리가 벌어집니다. 술이 떨어지자 주인은 식모에게 가게에 가서 술 한병만 외상으로 사오라고 말합니다. 청주(백화수복)로 보입니다. 술상은 둥글고 허름한 나무 밥상입니다. 소박한 안주가 놓여있고, 4명의 취한 사내가 큰 술병을 한손에 들고 술을 붓습니다.
흥에 겨운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먼저 노래가락을 뽑습니다. 베사메 ~ 베사메무쵸~
요즘엔 사람들과 집에서 술마시는 풍경은 도통 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제는 모두들 술집에서 술을 마시지요. 하지만 보통의 술집에서는 흥에 겨워도 노래를 하기 어렵고, 또 실내 음악과 주변 손님들로 인해 집에서와 달리 침묵과 떠들썩함의 아름다운 조화가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냥 모두들 웅성거릴 뿐이지요.
마음이 한가로울 때 차맛이든 술맛이든 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한국의 문화 중에 가장 회복하고 싶은 것이 이웃들, 친구들과 집에서 음식과 차(또는 약간의 술)를 나누는 문화라고 생각합니다.(대신 서로 부담없는 소박한 수준이면 좋겠습니다)
작은 집(약 15평)이 누구에게든 주어지고, 사람들과 집에서 음식과 차(또는 약간의 술)를 나누는 그런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꿈꿔봅니다.